어쌔신 크리드 오리진 - 본편 클리어 후 소감
어쌔신 크리드 오리진은 여러가지 의미로 시리즈를 리부트하는 작품입니다. 게임 엔진부터 게임 메카닉까지 세대교체했기 때문인데, 이전까지 나온 작품(신디케이트)은 구버전 어크, 오리진 이후는 신버전으로 봐도 무방합니다. 이전까지 해온 사람이라면 그만큼 변경점이 체감적으로 크게 와닿을 겁니다. 스토리도 오리진 타이틀으로 말미암아 암살단이 최초로 만들어진 계기와 함께 떡밥도 좀 풀어주리라는 기대를 하게 됩니다.
먼저 그래픽이 크게 파워업 했습니다. 이전 유니티나 신디케이트도 충분히 멋진 그래픽이었습니다만, 게임엔진을 교체해서 그런지 이전보다 로딩없이 돌아다닐 수 있는 스케일이 훨씬 커지고, 동시에 촘촘해졌습니다. 그래서 예전의 좋은 그래픽+광대한 규모로 다른 국가의 역사속 세계를 여행하는 맛이 한층 더 좋아졌죠. 유비도 이 장점을 잘 알고 있는지 오디오 코멘터리를 비롯해 가상투어 기능까지 게임에 내장시키고 있습니다.
개인적으로 이 게임에서 느꼈던 가장 기분좋은 경험은 사방 10 Km 의 공간에서 지금은 가기 어려운 이국의 풍취를 마음껏 즐길 수 있는 거네요. 특히 한번쯤 가보고 싶었던 광활한 사막을 누비다가 밤하늘의 별자리를 헤아리는 로망도 이 게임에서 어느정도 충족할 수 있었습니다. 파이널판타지 10 의 사막 맵 같이 눈으로 봐야만 하고 가볼 수 없었던 곳을 아무런 제한없이 돌아다니면서 배경화면으로 깔아도 족함이 없는 풍경을 감상하는 건 게임 이상으로 만족감을 주는 부분이었습니다.
한편, 게임 메카닉은 다소 호불호가 생길 수 있습니다. 이전까진 배트맨 아캄시리즈처럼 스타일리시하게 날아다니면서 단번에 암살의 일격을 날렸다면, 오리진부터 일반적인 액션 RPG 게임처럼 논타게팅 칼질로 바뀌고 암살 기능은 대폭 제한되었습니다. 이전에는 뛰어내리면서 여러명을 동시에 처치한다든가 아무리 적의 숫자가 많아도 휙휙 날아다니면서 암살검을 쑤시면 금방 평정되었는데, 적의 방향에 맞춰 방향을 기울인 채로 간격에 맞게 칼질을 해야 하고 암살 또한 전투 중에는 거의 쓸 수 없어서 한방에 적이 나가떨어지지 않습니다. 그러면서 적이 두셋만 되어도 굉장히 위협적으로 합격이 들어오기에 가능하면 1대1 상황이 되도록 빨리 처리해야 하죠. 게임 엔진을 교체하면서 사실상 범용 액션 RPG 로 장르 전환이 된 셈입니다. 같은 엔진을 써서 어크만이 아닌 다른 오픈월드 일반 액션 RPG 게임을 만들기 위해 만든 엔진같아 보입니다. 반대로 말하면 어크의 암살자다움(?)을 상당히 잃어버리고 전투가 좀 어려워진 것이 구판을 해본 사람에겐 가장 호불호가 갈리겠네요.
스토리는 좀 씁쓸합니다. 제목의 Origin 으로 예상되다시피 역대 시리즈 중 가장 옛날인 기원전 50년 쯤을 배경으로 하는 암살단 시작의 이야기입니다. 그러나 어크 시리즈를 관통하는 현대와 기억 속의 과거를 오가는 애니머스에 대해 풀어낸 떡밥은 거의 없다시피하고 예전 시리즈와 똑같이 독자적인 RPG 게임으로 보입니다. 기대감을 품고 '신의 목소리'를 끝까지 들어봤자 넋두리 같은 괘변 밖에 안합니다. 과거 어크3 편을 끝으로 스토리를 창조해낸 사람이 회사에서 나갔고 인기 시리즈를 유지하려니 어쩔 수 없긴 합니다만, 이렇게 무성의(?)하다면 앞으로도 떡밥을 풀기는 커녕 어크 시리즈의 인기가 사라질 때까지 각 나라를 배경으로 시리즈를 뽑는데 더 집중할 듯 합니다.
가장 큰 떡밥이 무성의한 것 외에 본편 스토리 내용 자체도 씁쓸합니다. 적어도 과거 시리즈는 악의 축과 선의 편인 주인공의 대립이 선명히 부각되는 편이었는데, 이번에는 나쁜놈도 제각기 사정이 있었다는 식으로 이야기를 풀어나가서 찝찝하게 만듭니다. 예를 들어 신을 숭상하는 신관이라는 놈은 고대 상이집트의 율법에 따르지 않는다고 사람들을 저주받은 것처럼 죽이고, 자식이 죽은 부모는 자식을 살릴 수 있을지도 모른다는 희망으로 무고한 사람들을 의식의 제물로 바칩니다. 법을 수호하는 대신은 아집에 사로잡혀 죽을 때까지 주인공을 무법자라고 부르며, 마을을 부흥시키기 위해 사람들을 가려서 죽이는 전사는 자신이 마을을 부흥시킬 수 있었을 거라며 주인공을 탓합니다. 전부 사회에서 엘리트에 속하는 사람들이지만 옳고 그름을 판단하는 능력을 상실하고 자신의 목적만을 달성하기 위해 이기적으로 주위를 모두 희생시키는 부류입니다. 사람들과 영웅들도 폭압에 저항하기 보다는 포기하고 좌절하면서 살거나 악당들의 앞잡이가 되어 또 다른 비극을 일으킵니다. 착취로 인해 수백명이 기아로 죽어가는 가운데 도시에선 선동가들이 얼마나 재산이 증가했고 더 안전하게 살 수 있는지 선전합니다. 주인공 또한 그들의 계획에 휘말려 가족을 잃는 과정에서 그들의 소행이긴 하지만 자기 손으로 가족을 잃어버린 결과에 평생 죄책감을 안고 살아가야 합니다. 억지로 당한 건데 악당들이 오히려 피해자 코스프레하며 니가 죽였다고 추궁하는 모습도 짜증납니다.
이렇게 스토리를 좀 시리어스하게 꼬아놨기 때문에 이런 전개가 될 거라는 걸 눈치채는 시점에서 메인 스토리는 더 이상 진행하기 싫고 사이드만 깨작거리게 되죠. 2000년전 이집트 스토리인데 좀 신나고 판타지처럼 팍팍 진도 나가는 감성이 부족한 건 아닌지 제작진은 반성해야 합니다.
후반부 (연속퀘스트로 엔딩까지 직행) 에 들어서면 다른 게임을 하는 것처럼 스토리가 확 바뀝니다. 거진 주인공이 교체되다시피 해서 지금까지 수십시간 플레이한 유저의 아바타는 방관자가 되고 새로운 주인공이 대두되니 도저히 몰입이 안됩니다. 감정선도 엉망진창이라서 재미없고요. 끝은 미리 정해놨는데 주연 배우들이 어거지로 연기하도록 제작진들이 무대 위로 뛰쳐나와 이리저리 지시하는, 마치 유치원 학예회 같은 어색함까지 느껴집니다.
메인스토리와 별개인 사이드 스토리는 여전합니다. 유비식 오픈월드 RPG 게임에 거의 반드시 따라붙는 비판은 넓은 맵에 의미없이 퀘스트와 수집요소를 흩뿌려 놓는 거죠. 오리진은 그런 면에서 이전 시리즈에 비해 확실히 잘 만들었습니다. 광대한 이집트 필드와 수천년 이집트 역사를 이용해 흥미로운 자연 경관 속 개연성 있는 장소에 수집요소를 배치해놨습니다. 퍼즐도 다소 불편하지만 이전에 비해서 도전할만한 적절한 난이도였구요.
하지만 사이드퀘스트는 하다보면 주인공이 심부름센터 직원과 구분이 안 갈 정도로 마구 부려먹힙니다. 본편의 시리어스한 진행과 대조적으로 개그인 퀘스트도 있어서 긴장을 완화시켜주는 기능을 하기도 하지만, 감성의 기저에 본편과 같은 블랙코미디 개그코드가 삽입되어 있거나 리얼하게 어두운 스토리를 담고 있어서 본편처럼 별로 매력적이지 않습니다.
그렇다고 사이드스토리를 안 할 수도 없는데, 요즘 유비가 DLC에 맛들여서 레벨업 노가다를 안하면 메인스토리조차 진행이 안 될 정도로 제한을 걸어놨기에 막대한 EXP 를 보상으로 주는 사이드 퀘스트를 어느 정도 해야 하는 건 필수입니다. 아니면 성능업 DLC 를 돈주고 사든지요.
아참, 스토리의 내용과 별개로 퀘스트 중 또는 클리어 이후에도 말을 걸면 상황에 맞는 대사가 더 나오는 건 맘에 들더군요. 마치 팔콤 RPG 게임의 방대한 NPC 대사 스크립트를 보는 듯 했습니다. 전체적인 모양은 좀 그렇지만 세세한 부분까지 굉장히 신경써서 만든 게임인 건 분명합니다.
저는 맵을 전부 밝히고 사이드퀘스트를 조금 남겨둔 시점에서 엔딩을 봐서 55시간 정도 걸렸네요. 이제 남은 건 구입했을 때 합본으로 산 추가 미션 DLC 2개와 수집요소를 올클하는 것입니다. 어크 시리즈 전통으로 미션 DLC 는 같이 사는 것이 훨씬 이득이거든요. 그렇지만 본편 스토리부터 이렇게 허무하게 끝나니 DLC 까지 진도 나가려 해도 동기가 상당히 깎여버립니다. 몰입이 안되니 지금처럼 진득하게 플레이하진 못하고 시간 날때마다 조금씩 진도 나갈 생각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