엘든링 중반 소감 및 비평
게임이란 게이머와 개발자의 머리 싸움입니다. 개발자는 신이고 게이머는 신이 만든 게임이라는 세상을 탐험하며 신과 싸웁니다. 따라서 게임 공략은 시험 문제를 풀 때 출제자의 의도를 이해하는 행위로 비유할 수 있겠죠.
세상에는 다양한 종류의 게임이 있어서 항상 개발자가 게이머에게 시련을 주고 게이머가 이를 극복하는 전개가 되는 건 아닙니다. 때로는 게이머가 신이 되어 개발자가 주는 혜택을 누리기도 합니다. 이렇게 시련과 죽음이 없는 게임의 대표적인 예시로는 제가 좋아하는 심시티나 심즈 시리즈가 있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과거 쌍팔년대 고전 게임, 특히 슈퍼마리오 같은 플랫포머 게임은 목숨이 99개 있어도 올클하기 어려운, 개발자가 절대적인 신이 되어 게이머에게 시련을 주는 대표적인 게임입니다.
엘든 링을 위시한 소울류는 슈퍼마리오 같은 류의 게임으로 정의할 수 있습니다. 그 유명한 슈퍼마리오 1탄의 1-1 스테이지는 죽음(낙사나 적과 충돌 등)으로 플레이 방법을 학습하게 되는데, 이를 통해 은연중에 플레이어의 목숨은 하찮은 파리같고, 개발자는 절대적이며 무너뜨릴 수 없는 권위를 지닌 존재라는 걸 느끼게 됩니다. 엘든 링 또한 마찬가지입니다. 게임을 시작하자마자 맞닥뜨리게 되는 낙사로 죽기 쉬운 지형은 물론, 액션 게임을 어느 정도 하는 플레이어라도 거의 깰 수 없는 고난이도 보스가 나와서 무조건 죽임을 당한 후에야 실질적인 게임을 시작하게 됩니다. 플레이어는 단 한번도 안 죽고 플레이 하는 방법이 없는, 게임 시스템에 절대로 거역할 수 없다는 걸 무자비하게 학습하게 되는 거죠.
저는 액션치라서 근접전투로는 멀키트 절대로 못 깨고 영체 및 장비(활) 강화 노가다 끝에 고드릭, 라단까지 클리어한 시점에서 계속 든 생각은, 이 게임은 플레이어를 타이트한 굴레 속에 가둬놓고 학대하는 게임이라는 겁니다. 제가 슈퍼마리오를 싫어하는 이유와 동일하죠. 유저에게 주어지는 여유는 모두 개발자의 계산된 행동이자 단지 초반이라 주어지는 한푼짜리 자선이며, 후반부 맵에 들어가면 모든 여유를 동원해도 근본적인 전투 실력이 못되면 30번 뒤지다가 고혈압으로 머리가 빙빙 돌아가버립니다. 이건 농담이 아니고 젊은 사람이 아닌 나이 든 사람이라면 플레이 하기 위험한 게임일 수도 있습니다.
이런 류(대부분 플랫포머)의 게임은 치트나 트레이너를 써도 낙사 같이 한방에 죽는 구간이 있어서 소용이 없으며, 무조건 개발자의 의도에 따라 행동해야 합니다. 그 대신 개발자가 게임을 치밀하게 설계했다면 그걸 더듬어 나가면서 감탄하는 재미를 느낄 순 있지만, 그 이전에 저는 상호작용하는 미디어인 게임의 본질적인 의미를 흐리는 일방통행식 플레이에 왜 게임을 하는 건지 회의를 느낍니다. 이러면 저 말고도 다른 모든 사람이 다 똑같이 플레이 할 겁니다. 유튜브 영상과 유일하게 차이나는 건 죽음으로부터의 순간적인 회피에 의한 짜릿함 정도? 이런 류로 아예 특화된 게임으로는 리듬게임과 대전격투게임이 있죠. 전 리듬게임은 좋아하고 대전격투게임은 안하니 두 장르가 합쳐진 소울류는 저에겐 미묘할 수 밖에 없습니다.
요약하면, 제가 엘든링에 품기 시작한 불만은 슈퍼마리오와 동일한 자유도의 한계입니다. 겉보기만 오픈월드고 파밍의 자유지, 절벽에서 한치의 오차도 없는 고양이마리오식 점프나 가둬놓고 보스전 등을 치루다 보면 엘든 링을 막 시작했을 때의 개발자의 강압이 떠오르게 되는 겁니다. 넌 한낮 개미같은 미물이고 난 밟아죽이는 신이라고요. 한번 개발자(신)에게 굴복하고 게임에 익숙해지면 그쪽만의 세계 또한 있는 듯 싶습니다. 대부분의 닌텐도 게임이 이런 타이트한 고전게임 구조를 띄고 있던데, 닌텐도 게임만 추종하는 사람들도 많으니까요. 그러나 자유도에서 게임을 하는 의미를 찾는 저는 닌텐도 게임은 영 안 맞습니다. 신과 같은 개발자에 순종하기 보단 개발자의 얕은 의도를 파악하고 뛰어넘어 개발자를 농락하는(혹은 농락하는 듯한) 플레이를 할 때 더 큰 재미를 느낍니다. 그런 의미에서 폴아웃 시리즈는 단 한번도 죽지 않고 보스를 다양한 방식으로 파훼하는 즐거움이 있습니다. 모드를 깔아도 치트를 해도 재밌는 게임 설계죠.
엘든 링의 다른 면모에 대해 조금 더 평가하자면 스토리(퀘스트) 디자인이 다소 실망스럽습니다. 고드릭을 깰 때 까지만 해도 감탄하면서 플레이했는데, 그 이후로 플레이 순서가 많이 난잡해지더군요. 나름 스포일러를 최소화하려고 필요한 만큼의 공략만 봤는데, 어디에 있는지 알 수 없었던 NPC들을 여러차례 와리가리 하는 방식이었습니다. 하다못해 퀘스트 트랙커라든지 지나간 대사를 읽어 볼 수 있는 일지 같은 거라도 있으면 난 누구 여긴 어디 하는 사태는 없을 텐데, 만약 인터넷 공략없이 플레이 한다면 영원히 클리어하지 못했을 퀘스트 + 멀티 엔딩 투성이었습니다. 또한 아이템 설명을 읽어야만 게임과 세계관에 대한 이해도를 올릴 수 있는 것도 지나치게 구닥다리고 시대와 타협하지 않는 고전적인 설계입니다. 게이머는 게임 속 세계에서 아이템을 손에 들고 있는 아바타가 아닙니다. 손에 아이템 대신 패드를 들고 사각형 창과 제한된 UI 로 캐릭터를 들여다 보는 제 3 자입니다. 따라서 개발자는 게임 내 상황이 어떻게 흘러가는지 게이머에게 막힘없이 전달해줘야 원활한 게임이 가능합니다. 이는 어크 오디세이에서 수많은 서브 퀘스트를 즐겼던 제가 보증합니다. 어크 오디세이는 제가 해본 게임 중 스토리 텔링 및 게임 UI 분야에서 가장 진보한 게임이라 단 한번도 게임 내 메뉴 및 아이템 전용 설명을 보지 않고 화면에 나오는 대사와 UI만 집중해도 원활히 플레이 가능했거든요. (일부 히든 보물지도는 감점) 엘든 링의 프롬소프트는 게임의 몰입을 방해하고 잠시라도 핸드폰 공략을 쳐다보게 만드는 구식 퀘스트 디자인에 대한 반성이 필요합니다.
엘든 링 조작법은 구시대 어크를 연상케하는 소매틱스러운 복잡한 조작법입니다. 기능이 워낙 많아서 차라리 키보드로 하는게 낫지 않나 싶을 정도로 패드 버튼으로는 부족합니다. 참고로 프롬소프트의 조작법은 대대로 복잡하기로 유명해서 과거 아머드코어 같은 경우 플스 패드를 거꾸로 잡는 아머드코어 파지법이 존재할 정도입니다. 복잡한 조작법의 장점은 숙달한 유저라면 의도한 대로 정확한 커맨드를 넣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저와 같은 액션치 및 초보 유저는 특정 기능을 쓰려고 버벅거리다가 뒈짓하기 일쑤죠. 그럼 조작미스로 사망시에는 어떻게 될까요? 놀랍게도 자신을 자책하게 됩니다. 마찬가지로 구시대 어크나 엘든 링처럼 어려운 조작법을 미스하면 패드 던지는 일이 별로 없고 자신의 못난 실력을 탓하는데, 반대로 어크 오디세이처럼 조작법이 대폭 쉬워져서 초보도 조작하기 쉬워지면 패드 던지는 일이 많아집니다. 그리고 덤으로 개발자도 욕합니다. 즉, 죽기 얼마나 어렵고 쉬우느냐에 따라 개발자가 욕먹는 빈도가 달라지게 됩니다. ㅎㅎ
이 글은 1회차 클리어도 안하고 쓴 감상이므로 부정확할 가능성이 매우 높습니다. 또한 엘든 링의 수많은 장점은 생략하고 있습니다. 안 그러면 PS5 를 산 이후 오늘까지 10일 간 70시간이나 플레이하지 않았겠죠. 그러나 꾸준히 플레이 하면서 마음 속으로 품고 계속 부풀어 오르던 감상을 이렇게 한방 빵 터뜨려야 겠습니다. 짤짤이 플레이도 점차 한계에 도달해서 진행이 잘 안되고 있으므로 조만간 1회차도 못하고 포기하고 매각한 후, 나중에 PC판에서 치트질 막 해서 지금까지 저를 짓밟아온 개발자를 농락하는 플레이나 할 생각입니다. 남에게 피해주는 것도 아니고 혼자 하는 거니 이 정도는 괜찮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