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우굴 Foxhole 간단 소감
소개 글을 보고 간단히 입문해봤는데... 간단히 할 수 있는 게임이 아니었습니다.
이 게임은 최근 나온 디아블로4 와 유사한 탑다운뷰와 마우스 컨트롤로 1차 세계대전 참호전을 치루는 액션 슈팅 게임입니다. 이렇게만 쓰면 먼 옛날에 나온 코만도스 시리즈라든지 Company of Heroes 같은 현대전 배경 실시간 전략 게임이 떠오르실지도 모르겠는데, 이 게임은 다른 현대전 게임과 차별화하기 위하여 1차 세계대전의 알보병 시점으로 플레이어를 격하해버립니다.
보통 현대전 전략/전술 게임이라면 지휘관의 시점에서 수많은 부대를 전선으로 투입해 화려한 전투를 벌이지 않습니까? 그러나 이 게임은 지휘관의 지휘를 받는 입장인 알보병이 되어버리니 화려함과는 엄청나게 거리가 멉니다. 알보병은 전투에서 소모되어 죽는게 임무입니다. 보통 현대전 FPS 게임과 비교도 안 될 정도로 쉽게 픽픽 나자빠집니다. 플레이어 혼자서는 전황에 영향을 줄 정도의 영웅적인 임무가 불가능하다는 뜻입니다. 들 수 있는 무기도 제한이 심하고 탱크 하나 뽑으려면 피눈물나는 노력을 해야 하는 것이 여느 현대전 게임보다 가혹합니다.
이렇게 보면 스탈린그라드 전투처럼 총탄만 쥐어주고 전선에 투입되는 불합리한 게임으로 보입니다만, 전략적인 요소가 완전히 없는 건 아니라서 플레이어의 행동으로 무기 생산에 필요한 자원을 채집하는 요소가 추가되어 있습니다. 쉽게 말해서 안전한 후방지역에서 SCV 가 되어 불을 내뿜는 전선에 철이나 기름 같은 무기 생산에 필요한 요소를 보내는 거죠. 만약 백업이 충분치 않으면 격심한 소모전이 벌어지는 전선에서 싸우는 플레이어들이 리스폰 할 때 무기가 다 떨어져 아예 싸울 수 없게 되고, 그 결과 전선이 밀려나게 됩니다.
어찌보면 배틀필드와 유사한 점이 더 많은 게임입니다. 특화된 병과로 옷을 갈아입고 누구는 생산, 누구는 알보병, 누구는 탱크를 타고 싸우는 것이 배틀필드에서 자원 수집 요소를 더 추가한 것 같이 느껴집니다. 그러나 배틀필드와 치명적으로 차이나는 부분은 전투입니다. 기갑차량에 밀려 폭사하는 한이 있더라도 배틀필드는 적어도 적을 조준하고 쏘는 게임성을 느낄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이 게임은 2D 탑다운 뷰 시점으로 마우스 오른 클릭으로 조준하고 조준점이 맞춰질 때까지 기다렸다 쏴야 적을 정확히 제거할 수 있습니다. 조준도 단순히 방향을 돌리는게 아니라 높낮이 고저차도 고려해야 하므로 마우스 포인터를 적 위에 정확히 대는 까다로운 컨트롤을 요구합니다. 시야도 적이 한 눈에 들어오지 않고 오직 플레이어 시야에 닿아야만 순간적으로 보이며, 기둥 뒤에 서면 적이 바로 사라집니다. Fog of war 같은 만만한 게임이 아닌 거죠. 게다가 마우스로 화면 모서리 너머 2~3배까지 밀어댈 수 있는 걸 알게 되면 누가 먼저 시야에 적을 포착하느냐 게임이 되어 마우스를 마구 열심히 굴리게 됩니다. 시야 공유? 적의 위치 포착? 1차 세계대전이므로 그딴 건 없고 오직 플레이어 1인칭 시점으로만 정보를 보여주기에, 옆에 아군이 함께 달려가도 동료 이전에 플레이어의 눈으로 하는 피아 식별이 더 중요합니다. 덕분에 하나의 전장에 수백명이 들어갈 수 있다고 해도 한 화면에 들어오는 실질적인 플레이어 수는 고작 몇 명 수준에 불과합니다.
전투 하나만 복잡하고 어렵고 빠른 적응이 힘든 건 아닙니다. 이 게임은 전반적으로 UI 최적화가 안되어 있어서 컨트롤이 매우 복잡하고 허구언날 마우스로 탑다운 메뉴를 열어 장비를 얻고 제거하고 하는 반복작업의 연속입니다. 전투보다 전투에 돌입하기 전 준비할 게 더 많다는 뜻이죠. 자원 채취도 마찬가지입니다. 크레인을 운전하고 물건을 집고 공장으로 수송해야 하는 등 번거로운게 한두가지가 아닙니다. 요새나 철조망을 건설하는 것도 그냥 마우스 왼클릭을 누른 채 몇분간 가만히 서 있는게 전부입니다. 모든 행동이 거북이같이 느리고 시간을 엄청나게 잡아먹습니다.
결론적으로 말하면 ARMA 시리즈처럼 진입장벽이 천정부지로 높은 게임입니다. 억지로 7 시간 동안 밀어봤으나 가장 큰 특징인 자원채취는 수수하고 재미도 없으며 같은 팀에게 확실하게 기여한다는 보상을 주지 못합니다. 전투는 장비 세팅이 번거롭고 시야를 확보하기 위해 계속 마우스를 돌려야 해서 힘들고 지치게 만들며, 그에 반해 적을 포착하고 마침내 사살하는 과정은 극히 일부라서 보상감이 배틀필드같은 즉흥적인 FPS 에 비하여 심하게 부족합니다.
이 게임은 과거부터 나온 배틀필드 같은 게임에서 한 번 쯤 있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던 훨씬 디테일한 요소를 포함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거북이같은 느린 페이스로 전쟁의 긴박감을 주지 못하고, UI가 큰 걸림돌이 되어 플레이어로 하여금 끊임없이 인내와 고통을 요구하는 불합리한 구조로 되어 있습니다. 얼리엑세스를 시작하고 수 년이 지나 정식 발매된 게임이 이 정도이니 더 이상 큰 변화를 기대할 수도 없습니다. 유저들이 꿈꾸던 컨셉을 실현시키고 나름 현실적인 전장 구현에 성공했습니다만, 실제 전쟁처럼 플레이어를 비참한 알보병으로 구르게 만들고, 삽질하느라 몇시간을 소모하는 재미없는 게임인 것이 최대 단점이었습니다. 전쟁은 재미가 없습니다. 게임을 팔리게 만들려면 비현실적인 전쟁이 되어야 할 것 같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