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년만의 폴아웃 76 소감
폴아웃 76 을 예약구매 했다가 1시간도 안하고 접은 후 5년 만에 다시 해봤습니다. 마침 일본에서 후쿠시마 원전 방사능 오염수 100년간 방류 시작하는 날이기도 합니다.
게임 시작하니 눈에 띄는 건 역시 완전 한글화입니다. 폴아웃 시리즈에서 한글화 된 건 거의 없고 베데스다 회사 자체도 한글화에 인색한 회사입니다. 그런데도 한글화 해준 건 이 게임이 기존의 폴아웃과 다른 멀티플레이어 온라인 전용 라이브 서비스 게임이기 때문입니다.
하다보니 제가 접었던 이유가 새록새록 떠오르더군요. 과거에는 풀숲만 보이던 벌판이 5년이 지나자 NPC 생존자로 가득 찬 건 의외였습니다만, 똑같은 말만 반복하고 대화 인터페이스가 이전시리즈보다 오히려 후퇴하는 등 온라인 게임으로 변하면서 불편한 점이 산더미 같아졌습니다.
온라인 게임이니 당연히 모드질도 못하므로 UI 바꾸는 방법은 없고 바닐라로만 플레이해야 합니다. 그리고 온라인 게임이므로 당연하다는 듯이 일일 과제 (숙제) 로 짤짤이 작업을 해야 하고 빠른 레벨업을 하려면 게임내 캐쉬로 현질하라고 시도 때도 없이 들이댑니다. 과거 싱글 플레이 시절엔 하루 10시간 붙잡고 게임 진도 쭉쭉 나갔는데 온라인 게임이 되자 더 이상 과거 같은 플레이는 불가능해진 거죠.
폴아웃 같은 오픈월드 게임에서 모드질이 꼭 필요한 건 아닙니다. 보통은 1회차 끝내고 2회차 플레이시 반복되는 내용 때문에 지루함을 달랠려고 변화를 주거나 빨리 레벨업하는 거죠. 그리고 오픈월드 모드질로 가장 유명한 게임사였던 베데스다였기에, 모드질이 불가능한 폴아웃 76 은 시리즈에서 가장 이질감이 심한 작품이 되었습니다.
폴아웃 76 이 시리즈에서 가장 이탈한 게임으로 느껴지는 특징은 한두군데가 아닙니다. 처음 볼트 76을 나가자마자 느꼈던 배신감, 좌절감은 울창한 수풀로 뒤덮힌 땅 때문이었죠. 아무리 추가 설정을 붙였다지만 폴아웃 프랜차이즈의 황무지를 GECK 으로 방사능을 정화하고 사람이 살 수 있는 곳을 만든다는 궁극적인 목표부터 바스러져 게임의 원동력을 잃어버렸습니다.
폴아웃 시리즈의 대표적인 특징 중 하나는 모든 시체가 끝까지 남아 있는 겁니다. 마을 한군데를 모조리 털고 아이템까지 싹 다 쓸어가면 게임 끝날 때까지 그 마을은 퀘스트 관련 진행이 있는게 아닌 이상 끝까지 시체 빼고 텅 비어있게 되며, 심지어 퀘스트도 영향을 받게 됩니다. 하지만 이 게임은 온라인 게임이라 재접속하면 죽은 시체가 전부 살아납니다! 싹 다 긁어간 물건도 전부 리젠되어 또 다시 폐품수집하러 갈 수 있습니다. 젤다 야숨의 붉은 달 같은 요소는 콘솔의 성능이 부족해서 어쩔 수 없이 붉은 달을 이용하도록 게임 시스템까지 바꾼 겁니다. 폴아웃 시리즈의 끝까지 남는 시체와 루팅하면 영원히 사라지는 아이템이 특별했던 건 게임 내 경제 등 게임 시스템과 연동되어 있어서 적절합니다. 한편, 온라인 게임인 폴아웃 76도 무한 루팅으로 인한 인플레이션을 방지하기 위하여 주은 아이템의 가치를 1~3캡으로 폭락시킵니다! 바뀐 루팅 시스템에 맞춰 경제 시스템도 변경한 결과는 폐지줍는 게임입니다. 이게 재밌습니까?
또한 멀티플레이어 게임이 되어버리니 다른 유저의 눈치를 봐야 하고 다른 유저가 만든 기지가 매우 유용해서 들르지 않을 수 없습니다. 지금까진 고독한 황무지에서 혼자 돌아다니며 외로운 게임을 해왔는데 그 고독의 감정을 이 게임에선 더 이상 느낄 수 없게 되었습니다. 폴아웃 3 에 몰입해서 플레이 했을 땐 꿈에서 핵폭탄이 터진 아포칼립스 세상속에서 생존하는 내용이 몇 번이나 나올 정도였습니다. 그런데 폴아웃 76에선 시리즈의 상궤를 완전히 벗어나 이전 시리즈와 도저히 연결이 안되었습니다. 거기에 앞서 말한 GECK 같은 중요한 목표도 없고, 평범한 MMORPG처럼 일일과제 및 폐품수집 짤짤이나 하러 돌아다닐 생각은 더더욱 없으므로 더 이상 게임을 하고 싶지 않습니다.
5년이 지나자 폴아웃 76은 쓰레기통에서 여느 MMORPG 같은 게임이 되었습니다. 느리지만 업데이트를 꾸준히 해왔고 싱글 게임 다운 부분도 있어서 스토리 라인까지만 플레이하고 관둘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게임에서의 모든 경험은 전통적인 폴아웃 유저인 저의 기대치를 전혀 만족시키지 못했으며, 그저 폴아웃의 과거의 유산을 긁어와 무미건조하게 뿌려놓은 평범한 게임입니다. 목적성 없는 허무한 MMORPG 는 세상에 넘쳐나므로 폴아웃 76을 특별히 선택할 필요는 없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