왜 졸업하지 못하고 게임을 접는가
게임 졸업이란 특정 게임을 만족스럽게 플레이 했다는 뜻입니다.
대부분의 사람에게는 1회차 클리어가 졸업이며 어떤 사람은 게임이 제공하는 모든 걸 한 번은 클리어한 것일 수 있으며
어떤 사람은 게임에서 가능한 모든 것을 싹싹 훑어먹고 스피드런 타임어택까지 하는 수백 수천시간 플레이를 의미할 수도 있습니다. 같은 사람이라도 게임마다 졸업 시점이 다를 수 있습니다.
졸업이란 다시는 뒤돌아보지 않고 떠나겠다는 마침표를 찍는 자기 만족적 행위입니다.
젤다무쌍 하이랄의 전설들은 매우 훌륭한 액션 게임입니다. 무쌍 계열이라 단순 반복 액션이지만 지금 다시 해도 즐겁게 할 수 있습니다. 파고드는 요소도 엄청나게 많기에 아직도 할 것이 산같이 남아있습니다. 저에게 이 게임의 졸업 포인트는 미리 준비된 모든 스테이지를 클리어하고 수집요소를 전부 챙기는 수백시간 플레이 입니다. 그럼에도 졸업까지 올클하지 않고 이 시점에서 중단하기로 결정했습니다.
이 글은 좋은 게임인데도 졸업까지 플레이하지 않고 중간에 멈추는 이유에 대한 개인적인 소회를 적어봅니다.
1. 신체능력이 필요한 액션 게임에 존재하는 "벽"
정적인 SRPG 나 JRPG 라면 약캐로 플레이 하더라도 시간을 들여 고민하거나 공략을 보면 깰 수 있습니다.
하지만 플레이어의 능력이 캐릭터의 성능까지 좌우하는 실시간 액션게임은 공략을 봐도 어쩔 수 없는 "벽"이 존재합니다.
그렇기에 저는 벽에 막혀 게임의 모든 컨텐츠를 즐기지 못한 채 게임을 접습니다.
2. 강캐와 약캐
액션 게임은 캐릭터마다 조작감과 액션성이 다릅니다. 강캐로 분류되는 메인캐 대부분은 경쾌하게 적을 다 쓸어버리는 빠른 콤보캐이지만 마이너한 캐릭터로 갈수록 난타는 엄청 약하기에 기 모으기, 적을 쓸어담으면서 콤보를 모은 후 터뜨리기, 제자리에서 포격만 하기 등 다양한 액션이 강요됩니다. 액션 게임은 기본적으로 한 번에 한 캐릭터만 조종할 수 있기에 다른 캐릭터를 쓰는 경우 게임성까지 달라진다고 할 수 있습니다.
당연히 호불호가 갈립니다. 저 마이너한 캐릭터들 대부분이 상급자용으로 분류되는 허접캐거든요. 약캐로 플레이하면 게임성이 다르게 느껴지고 답답하고 시원시원한 맛이 없어서 재미없습니다. 보통 게임이면 강캐부터 만렙까지 육성하여 약캐를 덤으로 성장시키죠. 하지만 액션 게임은 강캐와 약캐를 동시에 플레이할 수 없어서 파티플로 서로의 약점을 보완하고 시너지 효과를 내는 것이 힘듭니다.
3. 반드시 모든 캐릭터를 끝까지 파는 것이 좋은 게임 디자인인가?
제가 좋아하는 디스가이아 시리즈는 1억 레벨까지 올리는 노가다 SRPG 로 유명합니다. 사용 가능한 캐릭터도 50여명이나 됩니다. 그러나 실제로 쓰는 캐릭터는 강캐들 뿐이며, 사용하기 편리한 강캐 몇개만으로 최종 컨텐츠인 진 수라바알까지 뚫을 수 있습니다. 50여명의 캐릭터 전부 풀업하고 모든 스킬 배우는 목표없는 노가다는 졸업을 훨씬 초과하는 시간 낭비라고 생각했습니다. 다행이 모든 캐릭터 풀업그레이드할 필요없이 게임 내 모든 컨텐츠를 한 번은 샅샅이 훑어볼 수 있었기에 접으면서 만족스러웠고 지금도 게임을 졸업한 것이 뿌듯하게 느껴집니다.
젤다무쌍 하이랄의 전설들은 스테이지 출격 캐릭터를 제한하여 약캐 단독 플레이를 강요합니다. 엔드 게임으로 향하는 여정을 29명의 캐릭터 전부 골고루 플레이하도록 강제하고 있는 겁니다. 이는 강캐만 써서 진도나가는 재미까지 막아버립니다. 제가 벽에 막힌 것도 강캐만 좋아하기에 약캐 전용 스테이지를 더 이상 못 뚫어서 입니다.
컨텐츠의 부족을 난이도를 올려 억지로 플탐을 늘리려고 넣은 거겠지만, 액션 게임은 개인마다 클리어 가능한 실력이 차이나기 때문에 이런 불합리한 장벽은 불쾌할 따름입니다.
4. 노가다 컨텐츠가 재밌는가?
다시 디스가이아를 예시로 들어봅니다. 스토리 1회차 완료하면 보통 레벨 100 넘습니다. 최종 목표인 1억 레벨에 도달하려면 막대한 경험치가 필요하고, 그만큼 많고 강한 적을 쓸어버리기 위해 파워 인플레이션이 일어납니다. 보통 게임은 캐릭터를 파워업 시키려면 특정한 시련을 넘도록 되어 있습니다. 파판 시리즈의 칠요의 무기라든지 어크 시리즈의 수집품 모으기라든지요. 대부분 몇 시간은 도전해야 하는 상당한 고난이도입니다.
디스가이아의 최대 매력은 노가다 과정이 매우 촘촘하고 각 단계가 어렵지 않으며 다채롭게 잘 꾸며져 있습니다. 레벨 100 에서 400까지 노가다할 수 있는 맵을 제공하고 그 이상은 또 다시 새로운 노가다 맵을 제공하는 식의 반복으로 레벨 9999까지 융단 위를 걸어가듯 캐릭터를 폭렙업하는 재미를 누릴 수 있습니다. 그 이상은 수라계라는 시련을 뚫어야 하며, 시리즈마다 퍼즐이라든지 강력한 적을 상대하는 식으로 다양한 시련이 존재합니다. 그래도 완전히 막히는 일은 없습니다. SRPG 니까 퍼즐은 공략보고 풀면 되고, 적이 강하면 이쪽이 조금만 더 노가다해서 강하게 하여 물리치면 그만입니다. 그래서 마침내 수라계를 뚫고 나면 최후의 레벨업 폭증 노가다맵이 열려서 한 번만 싸워도 9999 레벨씩 올립니다. 마지막 수라 바알 최종보스를 해치우기 위해 강캐들만 스펙을 올리고 남은 맵들의 숨은 요소도 다 찾아내고, 마침내 진 수라바알까지 해치우면 할 거 없어서 게임을 졸업하게 됩니다.
젤다무쌍 하이랄의 영웅들에서의 노가다는 반복되는 맵에서 클리어 조건만 달리하는 시련입니다. 이미 플레이했던 맵을 다양한 조건을 걸고 클리어해야 하며, 일련의 이벤트가 연속적으로 발생하는 시나리오 맵의 경우 히든 요소를 찾으려면 특정 시점에 아군 피는 깎이지 않고 적 진영 중 어디만 점령하고 어느 적은 잡지 않는 식으로 매우 까다로운 도전의 연속입니다. 머리 놓고 마구 싸우면 절대로 클리어할 수 없으며, 수많은 요구 조건을 만족시키기 위해 전장을 계속 헤매야 합니다.
이게 말이 됩니까? 적에게서 도망치면서 선택적으로 점령하거나 조종이나 지시가 불가능한 아군이 맞지 않도록 호위하는 것이 무쌍이라는 게임의 본질과 맞나요? 디스가이아는 그냥 싸우고 잡아서 레벨업으로 강해지면 됩니다. 젤다 무쌍은 까칠한 히든요소 클리어 조건을 볼 때마다 그냥 재미없고 억지로 플탐 늘리려는게 눈에 보여서 차갑게 식어버립니다.
5. 아쉬움을 남기고 떠나는 미련
주어진 컨텐츠를 모두 즐기지 못하고 중도 탈락하면서 생기는 찝찝함이 게이머로서 불만족스럽습니다. 조금 남아있는 다시 해보고 싶은 욕구도 "그 게임 재밌었지" 만이 아니라 "그 허접캐로 벽에 막혀서 끝까지 못 본 것이 한스럽다" 라는 부정적인 감정이 일정부분 차지합니다.
"실력이 허접하면 구입하지 말거나 조용히 접지 왜 찡찡대냐"고 말하실 분도 있겠지만, 게임을 만드는 관점에서 보면 가능한 한 많은 게이머에게 좋은 인상을 남겨야 합니다. 그래야 다음 게임도 사주거든요. 엘든링도 재밌지만 하도 욕하면서 플레이 했기에 DLC 구매는 찜 버튼에 넣어두고 있습니다. 70% 할인하려면 5년은 더 있어야 겠죠. 무쌍 시리즈는 거의 매년 신작이 나오는 부지런한 게임입니다. 따라서 게이머가 "아 참 재밌었다"라고 생각하면 다음 년도 게임 구매로 이어집니다.
대부분의 게이머라면 초반부만 하고 그만두는 것이 현실이지만 제 경우처럼 엔드 게임까지 모든 컨텐츠 클리어 여부가 중요한 게이머도 있습니다. 이 게임은 재밌기 때문에 졸업을 하지 못한 미련이 강하게 남았고, 덕분에 다른 무쌍 게임도 이 게임처럼 졸업 난이도가 흉악하지 않을까 걱정됩니다.
제 불길한 예상은 틀리지 않아서 플탐 확인해보니 무쌍 시리즈 대부분이 100 시간 넘는 엄청난 노가다를 자랑하는군요.
그래서 다음 무쌍은 PC 스팀에서 구입하여 치트플로 깨려고 합니다. ㅎㅎ