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트로 엑소더스 : 이게 맞는 걸까?
이전에 메트로 2033 을 재밌게 플레이 했던 기억이 있기에 할인할 때 구입한 메트로 엑소더스를 잠깐 플레이 해봤습니다. 1회차 클리어도 아니고 초반에서 문턱에 걸려 더 이상 플레이를 망설이고 있는 상태라서 간단한 고찰 정도의 글입니다. 메트로 시리즈 (메트로 2033, 메트로 라스트 라이트, 메트로 엑소더스) 게임 및 책을 본 적 없는 분이라면 스포일러가 될 수 있으니 아래 절취선은 읽지 마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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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제는 흔한 핵전쟁 포스트 아포칼립스 세계관인 메트로 2033 에서 저를 가장 매혹시켰던 건 오직 홀로 살아남은 러시아 지하철 국가였습니다. 전세계가 말 그대로 끝장났고 서방 국가에겐 전혀 생소한 소재인 모스크바 지하철을 소재로 지하에서 살아가는 사람들의 고독한 사투 이야기는 굉장히 독특하고 신선했습니다. 주인공 아르티옴은 비좁고 어두컴컴한 세계에서 어떻게 살아가야 할지 고민하는 지식인으로, 가족이 실종되자 그를 찾아 모험을 떠납니다.
2033 마지막에서 아르티옴은 적인 줄 알았던 초현실적인 존재가 실은 인간과 교류를 하고 싶어하는 지적인 존재라는 걸 알게 되지만, 그들이 정말로 메트로에 살고 있는 인류에게 우호적인 존재인지 판단해야 했습니다. 정사에서의 아르티옴은 100층짜리 통신탑을 등반한 끝에 핵미사일을 발사하여 검은 유령들을 싹 제거해버리지만, 세계에 몇 만명 밖에 안되는 구 모스크바 거주민, 현 메트로 시민들이 유일한 지적 생명체라는 걸 상기하며 고독감에 주저앉습니다.
주인공이 고민하는 모습은 정말로 벼랑끝에 몰려있던 인류가 외부와의 교류를 갈망하지만, 한 편으로는 자신들의 손으로 지구 모든 곳이 생명체가 살 수 없는 지옥을 만들어 버린 적이 있기에 또 다시 지적 생명체와 교류하는 것에 망설이는 모습이 인상적이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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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33 이후로 2034 (소설) 을 기반으로 한 라스트 라이트가 출시되었으며, 엑소더스는 소설판 2035 를 기반으로 한 연작 시리즈입니다. 그럼 2035에서의 아르티옴은 어떻게 되었는지 살펴볼까요?
여느 때와 같이 마스크 없이는 숨도 쉴 수 없는 지상으로 나간 아르티옴은 죄책감을 안고 지구의 어딘가에 살아있는 사람이 있기를 바라며 라디오 신호가 잡히기를 바랍니다. 그리고 수확없이 집으로 돌아가다가 무려 지상에서 열차가 지나가는 걸 발견합니다. 그리고 수백 Km 떨어진 외부의 마을에서 온 노인들도 발견합니다. 그들 말로는 모스크바 외에도 사람들이 멀쩡히 잘 살고 있고 자기들은 모스크바로 향한 아들이 실종되자 찾으러 왔다고 합니다.
저는 여기서 머리를 꽝 얻어맞는 것 같은 충격을 느꼈습니다. 이건 마치 스타워즈에서 초광속 항행으로 적 함대를 날려버린 라스트 제다이 급의 설정 붕괴입니다. 아르티옴의 고민은 모스크바에서만 인류가 쥐새끼처럼 살아남았고 인류를 구원했을 지도 모를 유일한 지적 생명체를 몰살해버린 것에서 기인합니다. 그런데 알고보니 누군가가 전파만 막고 있었고 모스크바를 제외한 전세계는 완전 멀쩡히 살아가고 있었습니다. 방사능 수준도 내려가서 마스크 없이 살 수 있는 곳이 불과 수백 Km 떨어진 곳에 있습니다.
이러면 아르티옴이 전작까지 해온 모든 업적은 삽질이 되어버립니다. 개구리의 장렬한 발돋움은 우물 안의 개구리로 폄하됩니다. 세계는 아르티옴 일행이 없는 편이 오히려 평화로울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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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작 소설을 전부 읽어 본 건 아니고 인터넷 상의 요약본만 봤는데, 메트로 시리즈는 후속작으로 갈수록 초현실적인 존재와의 조우나 아르티옴의 고독한 싸움 보다는 메트로 국가 간의 정치 싸움과 신경전 위주의 스토리로 가더군요. 아예 모스크바를 벗어나 드넓은 러시아 땅을 돌아 다닐 때에는 각지의 도시 국가에서 별개의 스토리가 전개됩니다. 내용은 여전히 암울하고 우울합니다만 아르티옴 개인의 싸움이 아닌 사회적 갈등과 전쟁이 주된 서사입니다. 이는 독재자 푸틴이 지배하고 있는 러시아의 현실을 완곡하게 비판하는 저자의 의도가 스며들어 있다고 하는데, 러시아 못지 않게 독재자를 겪은 한국인 입장에선 골치만 아프지 제가 원하는 전개가 아닙니다.
1편 2033 의 마지막 방송탑에서 망연자실하게 주저앉은 아르티옴의 모습을 기대한 저로선 엑소더스는 물론 메트로 시리즈에도 더 이상 흥미가 가지 않습니다. 이는 지극히 개인적인 취향이오니 저와 취향이 다르다면 감상이 다를 수 있습니다. 멸망한 세상에서의 고독한 생존 싸움보다 인간들 간의 갈등 묘사를 더 좋아하시는 분이라면 관심을 가질 만한 게임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