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부러 모바일 게임 리뷰를 하기 위해 마침 PS4 로 나온 벽람항로를 예판하고, 한 달 동안 모바일 버전 벽람항로를 하다 막 출시된 게임을 플레이 해봤습니다.
1. 스토리 ★(★★★★★)
이 게임의 본질은 팬서비스 게임입니다. 오직 벽람항로를 플레이 해본 유저들을 위해 만들어진, 벽람항로 제작사인 중국의 만쥬 사가 일본의 컴파일하트에 하청을 줘서 취향에 맞춰 만든 게임이죠. 팬서비스 게임이란 원작에 해당하는 미디어의 이미지를 절대로 깨뜨리지 않고 원작에 도움이 되는 부가 서비스 효과를 주는데 주력하는 걸 말합니다. 따라서 기존 등장인물의 설정 파괴라든지 파격적인 스토리, 확 다른 게임성 같은 걸 기대하면 안됩니다.
작중에 등장하는 인물들은 전부 본편인 모바일판 벽람항로의 400명이 넘는 캐릭터들 중 인기 캐릭터 50 명 정도만 골라 등장합니다. 이들은 모바일 판에선 전부 특별한 개성을 지니고 있는데, PS4 판 벽람항로에서도 스토리는 다르지만 개개인의 성격은 원작과 완벽히 일치한다고 보면 됩니다. 심지어, PS4 고유의 주인공조차 원작 캐릭터들을 리스펙트하며 애지중지 모십니다.
원작 캐릭터의 후광이 이러한데 스토리는 말할 필요도 없습니다. 오리지널 스토리이긴 하지만 원작을 아주 살짝 비틀어 전투가 발생하는 개연성을 추가했는데, 컴파일하트 고유의 띵가띵가하는 분위기가 스부적 느껴지면서도 게임 진행의 대부분은 원작 캐릭터들이 지들끼리 대화하는 것입니다. 채팅 이벤트 들어가니 원작의 캐릭터들이 잡담을 나누다 끝나버리는 겁니다.
이러니, 모바일판 벽람항로를 즐겨본 적 없는 사람에게 있어서 이 게임은 또 다른 컴파일하트의 너절한 캐릭터 게임 밖에 안 될 겁니다.
하지만 모바일판 벽람항로를 즐기는 사람에겐 최고의 팬게임입니다. 원작(모바일)에선 거의 들을 일 없는 각 캐릭터의 성우가 그대로 등장하고, 빵빵한(?) 시나리오를 풀보이스로 전부 말해주기 때문에 귀르가즘까지 느끼실 겁니다. 물론, 성격도 원작 그대로 붕어빵이라 캐릭터 빠는 분들도 더할나위 흡족해 할 겁니다. 아, 특전 일러스트는 이미 모바일 벽람항로의 로딩스크린으로 다 써서 물 좀 빠졌겠네요.
2. 게임플레이 ★(★★★★★)
게임성조차 완벽한 팬서비스 게임입니다. 원작의 게임성을 모조리 따라했다고 보시면 됩니다. 도크, 무장슬롯, 부품명, 강화 방법, 레벨업 방식, 레벨업 한계, 호감도작, 배 모으기 등등. 심지어, 핵심인 슈팅 게임조차 똑같습니다! 시점만 3D 에 3인칭 관찰자 시점이 되었을 뿐이지, 2D 에어리어에서 왔다갔다하며 회피하고 어뢰 쏘는 건 이전과 거의 동일합니다. 따라서 모바일판 벽람항로를 즐기신 분은 전혀 이질감 없이 익숙해질 겁니다.
달리 말하면, 모바일판 벽람항로처럼 B 급 슈팅 게임입니다. 원작을 모르는 분은 클리어 하는데 1분도 안 걸리는 너무나 단순하고 반복적인 슈팅게임이라고 생각하실 겁니다. 게다가 레벨업 작, 호감도 작을 하기 위해 수백 수천번 반복플레이를 해야 된다고 깨닫는 순간 주저없이 패드를 던질 겁니다. 폐지 수집하는 것이나 다름없으니까요.
3. 그래픽 ★★
원작이 전부 2D 기반인 반면, 이 게임은 전투 페이즈만 3D 입니다. 2D 어드벤쳐 파트에선 얼굴 표정만 바꿀 뿐, 원작의 스탠딩 CG 그대로 써서 둥둥 떠다니기만 하는 방식이라 재미없습니다. 싼티가 풀풀 나죠.
3D 또한 실망스러운 건 마찬가지입니다. 원작의 2D 캐릭터를 3D 로 입체화 해서 볼 수 있다는 것에 감동하는 분들도 있겠지만, 아무런 배경 없이 캐릭터 3D 그래픽을 보는 사람에겐 그야말로 B급 게임 감성 작렬의 허접한 모델링 이상 이하도 아닐 겁니다.
그래도 로딩이 매우 짧아서 별 하나 더 줍니다.
4. 사운드 ★★★
원작 사운드 그냥 다 따왔습니다. 너무나 익숙한 모바일판의 전투 BGM 부터 모바일판을 재활용한 음악 투성이 입니다. 그래도 원작 사운드가 들어줄만 하기 때문에 별을 더 줍니다. 노동요이긴 하지만요.
단점이 있다면 음성 녹음 환경이 이상하다는 겁니다. 같은 캐릭터가 전혀 그럴 상황이 아닌데도 갑자기 보이스가 에코가 껴서 웅웅거립니다. 녹음 환경이 다른 건 아니고 제작시 뭔가 실수한 듯 합니다.
5. 트로피 난이도 ★★★★★
원작을 해보면 아시겠지만, 진짜 별거 아닌 폐지줍기를 수백 수천번 반복하는 게임입니다.
실제 난이도는 별 한 개 정도입니다만, 체감적으로 느껴지는 지루함 때문에 별 5개 줍니다.
6. 컨트롤러 : 양쪽 다
1분 내에 슈팅 페이즈 끝나므로 아무거나 써도 상관없습니다.
7. 총평 ★(★★★★)
모바일판 벽람항로를 즐기시는 분이라면 PS4 로 나온 모바일판 벽람항로라 생각하시면 됩니다. 최고의 요소는 원작의 인기 캐릭터 들이 개장한 모습으로 우루루 몰려나와 원작 그대로의 성우들의 목소리로 풍부한 대화를 나눈다는 점입니다. 그것만으로도 돈 값한다고 생각하실 겁니다.
허나, 벽람항로를 즐겨본 적 없는 분에겐 비추천합니다. 게임성은 원작 그대로 한없이 얕고 반복적이며 노가다를 요구합니다. 캐릭터들이 나누는 대사는 뜬금없고 스토리도 너무 화기애애해서 잠이 올 정도입니다. 플래티넘 작을 할 필요조차 못 느껴서 엔딩만 보고 끝냈네요.
여기서부터는 데스 스트랜딩, 그리고 벽람항로를 위시한 모바일 가챠게임에 대한 고찰입니다.
제아무리 어떤 수사여구를 붙여도 택배라는 직업에서 하는 일은 단순 작업입니다. 처음에 새로운 곳을 찾아갈 땐 흥미로울 수도 있지만, 같은 장소들을 몇 번이나 반복해서 왔다갔다 하다보면 지겹고 허무한 현자타임이 옵니다. 직업에 귀천이 없다고는 하지만 현실은 명백하게 재밌는 직업, 그리고 재미없는 직업의 구분이 존재합니다. 그래도 현실에선 돈이라는 대가를 받고 일하죠. 하지만 게임은요? 돈도 안 되는 디지털 데이터를 대가로 받는데 재밌는 일도 아닌 지루한 택배일을 게임에서도 왜 해야 하죠? 돈도 못 받는데?
잠깐만. 그러면 다른 게임들도 마찬가지죠. 극단적으로 말하자면, 현실에 존재하는 모든 게임은 전부 폐지 줍는 일입니다. 제아무리 공전의 인기를 끌은 파이널 판타지나 마리오 같은 게임이라 하더라도 현실에는 아무런 영향을 주지 않는, 대가가 없는 게임이라 똑같이 허무하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도 게임은 재밌습니다. 돈으로 받는 대가가 없는데 어째서일까요?
택배일을 하시는 분들은 돈이란 대가만 바라고 일하는 게 아닙니다. 택배일이 아무리 지루한 반복 노동이라 하더라도 반복해서 할 수 있는 건 스트레스를 견디면서 돈만 바라보고 일할 수 있기 때문이 아닙니다. 일에서 보람을 느끼기 때문입니다.
어떤 일이든 무조건 프레셔만 가하면 아무리 돈을 많이 줘도 인간은 반드시 부러지게 되어 있습니다. 그래서 인간은 중요한 일을 하는 중간에도 딴 짓을 하게 되어 있죠. 점심시간만이 아니라 일 하는 중간중간 쉬기도 하고, 동료들과 잡담을 나누기도 하고, 일과는 별개로 자기만의 미래나 취미를 상상하기도 합니다. 최근에는 마이크로 매니지먼트나 성과급제, 그리고 업무 시간 축소로 고효율화를 추구합니다만, 업무시간이 길든 짧든, 사람들은 직장에서 일만 하고 지내지 않고 적당히 놀면서 일합니다.
직장에서 노는 건 표면적으로는 월급 루팡으로 취급될 수도 있지만, 엄밀히 따지면 인간이 살아가는데 있어서 필요한 '딴짓'을 보충하는 행위이기도 합니다. 이게 없고 타이트한 상하차같은 직장은 제아무리 돈을 많이 줘도 금방 떠나가게 되고, 밥도 맛있고 분위기도 좋은 회사는 자연스럽게 재직 기간이 늘어나는 겁니다.
그리고, 데스 스트랜딩은 '좋은 택배 회사'에 속합니다. 트레일러부터 봐 온 유저는 게임을 하는 내내 끊임없이 '왜 내가 상하차 알바를 하는 거지?' '내가 왜 이딴 배달부 일을 하는 거지?' 라는 의문을 제기하게 되어 있습니다. 용사나 영웅이 나오는 게임에 비하면 너무나 주인공이 초라하고, 그걸 억지로 영웅적으로 개연성을 부연하기 위해 멸망한 세계관을 만들 정도지만 그래봤자 택배기사 입니다. 게임 내 시스템도 딱 실제 택배 시스템과 너무 유사해서 새로운 루트를 개척하면 보너스 점수를 주고 배송을 끝낸 후의 보람도 현실과 마찬가지로 느낄 수 있습니다.
물론 실제 택배일과는 달리 돈은 안 줍니다. 근데 하다보면 계속 하게 됩니다. 왜 데스 스트랜딩을 계속 하게 되는 걸까요?
제 답은 좋아요 시스템입니다. 좋아요 자체로 해금되는 게임 내 기능도 일부 있지만, 대부분의 상황에서 좋아요는 게임 내 화폐로 쓸 수도 없고 무기로도 쓸 수 없고 스토리에도 전혀 영향을 주지 않습니다. 그런데도 유저들은 게임의 '목적' 이나 '대가' 와는 관계 없는 '딴짓'을 하게 됩니다. 심지어, 딴 짓을 더욱 추구하려고 게임 진행을 던져두는 경우조차 있죠. 제가 바로 엔딩을 앞두고 70시간 동안 택배질 하던 사람입니다.
어느 정도 감 잡으셨으리라 생각합니다. 데스 스트랜딩의 위대한 점은 유저의 딴짓을 구체적으로 수치화 했다는 것입니다. 물론, 샘 포터 브리지가 졸거나 재밌는 행동을 하는 딴짓들도 재밌긴 하지만 '유저가 직접 할 수 있는 딴 짓' 이야 말로 이 게임의 참된 의미이자 진정한 재미인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오픈월드, 그리고 샌드박스 게임이 인기있는 이유이며, 마인크래프트나 폴아웃 시리즈의 참된 재미의 핵심입니다.
데스 스트랜딩은 그다지 복잡하지 않은 단순한 게임에도 '딴 짓' 요소를 성공적으로 삽입할 수 있음을 증명해냈습니다. 그것이 코지마의 업적입니다. 이제 남은 건 다른 게임에도 '딴 짓'을 심는 거죠.
모바일 가챠겜 - 폐지 줍는 게임의 대명사입니다. 게임성은 원형에 해당하는 게임에 비하면 한없이 간단하고 얕으며, 대부분의 경우 30초~2분도 안되는 짧은 플레이 타임으로 반복적인 플레이를 요구하고 있습니다.
벽람항로 또한 대표적인 모바일 가챠 게임입니다. 제가 처음으로 해본 가챠 게임인 확산성 밀리언아서보다 훨씬 제약이 줄긴 했지만, 조금이라도 진지하게 게임을 붙들고 파고들고자 하면 여지없이 현질을 요구하며 막아섭니다. 게임성도 수십년간에 걸쳐 나온 슈팅 게임에 비하면 너무나 간단한 몇십초짜리 2D 슈팅 게임입니다. 유저가 파고들만한 요소는 온갖 복잡한 폐지 줍는 시스템으로 0.01% 라도 무기와 장갑을 강화해서 딜링량을 늘려 빠르게 해치우는 것에만 집중되어 있습니다.
물론 대가는 없습니다. 현실의 대가는요. 디지털로 주는 대가도 헐벗은 전자계집의 일러스트 -그냥 픽시브나 유튭만 봐도 나오는 것- 뿐입니다. (* 전 이런 게임을 볼 때마다 픽시브 같은 일러스터들이 모인 사이트가 직접 모바일 가챠 게임을 만들면 훨씬 잘 나갈 것 같다고 생각하곤 합니다.)
가챠 게임의 특징은 게임에 몰입시키기 위해 매일 접속하는 걸 강요하면서도 몰입하는 순간 돈이 줄줄 흘러나오게 시스템을 제한한다는 것입니다. 그러기 위해 모든 시스템은 철저히 계산되어 조금이라도 + 에 해당하는 건 플레이 횟수를 제한하거나 돈을 많이 쓰게 만들고, - 에 해당하는 요소는 방치하거나 일부러 편의성을 높여 유저가 소모하게 만듭니다. 즉, 잘 짜여진 하나의 거대한 톱니바퀴들이죠.
그 어디에도 유저가 '딴 짓'을 할 요소는 없습니다. 기껏해야 일러스트나 성우의 목소리를 보며 망상하는 게 끝이죠.
말이 너무 길어지는 것 같아서 여기서 끊습니다.
모바일 가챠 게임은 물론, 어떤 게임에도 '딴 짓'을 추가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딴 짓'은 어떤 게임이라도 재밌게 만들 수 있습니다. 심지어 그게 셔틀이 되어 배달하는 게임이라 해도요.
벽람항로도 앞으로 몇 년 후면 서비스 종료하고 서버에 기록되어 있는 유저 데이터들도 전부 사라질 겁니다. 게임성은 제한되어 있고, 오리지널리티가 없기에 비슷한 게임은 넘쳐날 정도고, 이미 벽람보다 큰 게임이 망한 경우도 많습니다.
하지만, 유저가 '게임의 목적'에만 매달리지 않고 여유를 느끼게 할 만한 쉼터인 '딴 짓'을 할 수 있게 게임을 만든다면, 설령 그게 악명의 대명사인 모바일 가챠게임이라 하더라도 보다 많은 사람들이 게임에 재미를 느끼게 될 거라 확신합니다.
어떻게요? 기다리면 점점 더 많이 보일 겁니다. 이런 건 게임 개발의 기본 원리에 해당하는 거고, 손쉽게 게임의 재미를 증진시켜주는 요소인데 개발자들이 빼먹을 리가 없죠. 데스 스트랜딩 이후로 게임업계의 패러다임은 점점 변할 것입니다.
* 덧 : 벽람항로 모바일판은 전부 삭제했습니다. 햐~ 역시 업무형 게임을 안하니 삶이 풍요로워지는군요.